무위당선생의 생애와 학문에 대해 알아봅니다.

무위당 선생은 1903년생으로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셨다. 17세 때까지 서당에 다니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마쳤다. 집안이 빈한하여 장남으로서 집안을 일으킬 책임을 지고 교육을 받은 것이다. 그후 20세까지는 의학을 위주로 배우면서 생활의 방편을 모색했는데 수업료를 낼 수 없어 이리저리 스승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무위당선생이 의탁한 집에 어느날 당대의 대학자 석곡 이규준 선생이 방문했다. 무위당 선생은 심부름을 드나들며 먼 발치에서나마 석곡 선생의 학문이 깊음을 알고 한눈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틈을 보아 “어디로 가면 선생님을 뵈올 수 있습니까”하고 석곡 선생에게 여쭈었다. 석곡선생 또한 무위당선생의 천품을 알아보고 “모월모일 어디로 오너라”하고 떠났다.

 

무위당 선생은 곧장 당시 대구의 유력자였던 석재 서병오의 집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석재는 석곡선생보다 7세 연하로, 그의 문하에 들었으나 대구에서는 오히려 석곡보다 더 유명인사였다. 천석꾼에 군수를 지냈으며, 서화가이자 팔방미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 석재도 석곡을 만나 병고침을 받자 무릎을 꿇고 제자 되기를 청했다.

 

무위당선생은 무일푼으로 석재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힘겨운 학업이 시작됐다. 한달에 두어번 찾아온 석곡선생이 무위당선생을 부르면 평소 궁금했던 것을 한두마디 여쭙는 것이 당시 공부의 전부였다. 그러나 무위당선생은 비상한 결심으로 그 한계를 극복하며 스승의 학맥을 이었다. 얼마후 석곡이 세상을 떠나면서(1923) 석재에게 무위당선생을 부탁했고, 무위당선생은 6년7개월간의 문하생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20대 후반의 무위당선생은 한약방을 열었다. 주위에서는 나이와 경험이 적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치적으로 병을 다스려 내니 1년만에 명의로 소문이 났다. 주위의 연로한 약종상들도 젊은 무위당선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고, 결국 가솔들의 난치병까지 무위당선생에게 진료를 맡김으로써 백기를 들었다. 이런 명성 덕택에 시골의 한의사라는 고단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3년만에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말 갈수록 가혹해지는 수탈은 그나마 돈을 좀 번다고 소문난 한약방을 가만두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수탈이 심해지자 무위당선생은 마침내 몇몇 사람과 함께 산으로 피신했다. 그 와중에 해방이 됐다. 그는 산에서 내려와 가산을 정리해 대구로 자리를 옮겼다.

 

해방후 대구에서 한의원을 연 무위당선생은 제2회 한의사시험을 통과해 정식 한의사가 된다. 그러나 가급적 침술을 쓰지 않고 환자도 많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환자와 인생상담을 하고 세밀한 처방으로 난치병을 완치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때는 하루 10여명의 환자만 보았다고 전한다. 

 

한사람 한사람 꼭 맞는 처방을 통해 병을 완치해 주는 그의 실력에 혹해 많은 사람들이 문하를 드나들었다. 그도 대구 시절 후학을 기르기 위해 몇번이나 제자를 두었으나 대개 급한 처방 몇개 얻는 정도에 그치고 원론부터 배우고자 하는 열의는 적었던 모양이다. 그는 ‘고기잡는 법’을 가르치려 했으나 그의 문하에 드는 사람은 ‘고기’만 갖고 싶어했던 것이다.

 

무위당선생은 늘 자신의 실력을 내세우지 않고 조용한 인술을 폈다. 그러나 한때 마음고생을 심하게 겪는 바람에 40대에는 간경화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기도 했으며 50이 돼서야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고 한다. 1985년 평생을 각별한 정분으로 주위에서 부러워했던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무위당선생은 대구 한의원의 문을 닫고 큰아들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같은 부산 하늘 아래 살게 된 것, 이것이 젊은 한의사 그룹이 그를 찾아오게 된 계기가 된다.

 

당시 부산에서 활동중이던 경희대 한의대 동문 중 친한 선후배 10명이 모여 공부를 겸해 친목을 다지는 모임이 있었다. 이들은 매주 한번씩 만나곤 했는데 어느날 모임 회장을 맡고 있던 김중한(동의대 교수)씨가 어디서 무위당선생 말씀을 듣고 “대구에서 이름을 날리던 대단한 분이 부산에 와 계시다는데…”하며 운을 뗐다. 다들 궁금해하자 김교수가 먼저 찾아가 보기로 했다. 두번이나 무위당선생 댁에 다녀온 김교수는 “대단한 분이다. 원전(原典)부터 치병(治病)까지 막힘이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는 “우리끼리 공부할 것이 아니라 이분께 가서 배우자”고 발의했다. 그래서 10명의 젊은 한의사들은 그대로 무위당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게 됐다.

 

“선생님은 대구 시절의 경험 때문인지 1년 내내 황제내경 소문(素問)편만 강의하셨다. 마치 이 사람들이 정말 ‘공부’하러 온 것인지 시험하는 것 같았다. 사실 섣불리 처방부터 말했다가 제자들이 병리도 잘 모르고 부자 같은 약을 함부로 써서 탈을 냈더라면 지금의 소문학회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주위 한의사들도 ‘오래 가겠느냐’며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공부모임에 참석하는 한의사들은 점점 늘어났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소문학회로, 부산에서 창립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간 한의사들의 학술모임이다. 현재 도마다 지부가 설치되어 있다. 소문학회라는 이름은 무위당선생이 “황제내경 소문”(黃帝內經素問)을 기본으로 하여 의학을 강론했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중국 고대 황제 헌원씨가 지었다는 이 책은 동양의학의 경전으로 추앙받는다.

 

무위당 선생은 그의 스승인 대학자 석곡 선생에게서 의학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무위당선생이 유명해진 것은 어떤 특정한 질병을 잘 다스린다거나 특별한 비방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스승인 석곡 선생은 “황제내경 소문”의 핵심을 간추린 “소문대요”(素問大要)와 “동의보감”에서 소문의 원리에 맞는 내용을 간추린 “의감중마”(醫鑑重磨)라는 두권의 의서를 남겼고, 무위당선생은 스승의 처방을 전국에서 모아 편집한 “신방신편”과, “의감중마”에 고금의 처방을 편집해 넣은 “백병총괄 방약부편” 등 두권의 저서가 있다. 그는 스승에게서 배운 소문학을 평생 실천하면서 꾸준히 이를 널리 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무위당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조리있는 이론과 뛰어난 실력을 겸비한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그는 명성을 탐하지 않았고 유명세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지도 않았다. 비록 남의 앞에 나서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그를 존경했다.

 

그는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비방’을 위주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원론에서부터 병을 풀어 나가는 방법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종기 환자가 많았다. 때문에 많은 고약이 나왔으나 정말 효험 있는 고약 처방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바로 한의사들의 ‘비밀주의’ 때문에 훌륭한 처방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보면 무위당선생은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눠 주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무위당 선생님이 석곡 선생님을 만난 것도 인연이요, 선생님이 무병장수하신 것도 인연이다. 제자들이 찾아갔을 때 벌써 여든을 넘긴 선생님이 정신이 또렷하고 매일같이 찾아가도 강의하실 정도로 건강하셨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정통 한의학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