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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1-08-03 15:02
월간중앙 8월호에 나온 기사입니다.(1)
 글쓴이 : 소문지기
조회 : 9,002  
평생 실천으로 보인 仁術
난치병 치료에 도전하는 제자들


한방 名醫·名家를 찾아서 ①無爲堂 이원세翁과 素問學會

김일곤 월간중앙 기자(papak@joongang.co.kr)


바야흐로 한의학 중흥시대다. 전세계가 최첨단 기술을 응용한 서양의학으로도 풀지 못하는 治病의 원리를 깨우치기 위해 한의학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이에 “월간중앙”은 뛰어난 실력으로 존경받는 명의를 소개하는 한편 국내 한의학계의 실상과 가능성을 짚어보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그 첫 순서로 ‘素問學의 대가’ 무위당 이원세옹과 한의학의 정통성 회복을 통해 본격적인 ‘치료의학’으로의 발전을 모색해온 소문학회를 소개한다.




올해 28세인 A군은 모 한의대 졸업반이다. 고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입학한 A군이 한의대에 진학한 것은 그의 투병경험 때문. 6년전 A군은 심한 간질 증세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매일같이 투여하는 간질 치료제는 그때뿐, 병의 치유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부모님은 결국 한의원을 찾았다.

이렇게 해서 A군의 치료를 맡은 이는 부산 동의대 한의대 황원덕 교수. 치료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작 주기가 한달, 두달로 늘어나며 증세가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치료 3년째 되던 해에는 병원의 뇌파검사에서도 간질파가 검출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처방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그를 치료해 준 황교수는 ‘네게 맞게 만든 약’이라고만 했다. 병원에서 투여하던 ‘양약’과 황교수가 만들어 준 ‘한약’의 차이에 호기심을 느낀 A군은 한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두뇌가 명석한 A군은 치료를 마치던 그해 검정고시를 거쳐 한의대에 진학했다.


난치병 도전에 나선 한의학계의 프론티어들

황교수는 “A군에게 내린 처방은 환자의 상태에 따라 계속 변화를 주었다. 때로는 가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처방전 내용을 완전히 바꾸기도 했다”고 말했다. 때문에 A군에게는 ‘네게 맞는 약’이라고만 말해 주었던 것이다.

황교수는 요즘 매주 한번씩 서울을 오르내린다. 새로 맡은 뇌종양 환자 치료를 위해서다. 상당히 병이 진행된 후에야 종양이 발견된 B양은 현재 시력을 회복하고 간단한 외출도 가능할 정도로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원래 뇌종양 환자는 감정의 변화가 별로 없어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지만 요즘 B양은 무척 쾌활해져 부모들에게 가끔 재롱을 떨 정도다.

황교수는 “그동안 계속 한의학을 공부해 왔지만 이처럼 놀라운 사례를 접하게 된 것은 모두 무위당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고 난 후의 일이다. 선생님께 치병(治病)의 원리를 배운 후부터는 어떤 환자를 대하든 치료해 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소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태국 박사는 환청(幻聽)으로 고생하는 여고생 C양을 완치시킨 경험이 있다. 6개월이나 통원치료받아도 차도가 없자 병원에서는 입원치료를 권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딸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꺼림칙했던 C양의 부모가 찾은 곳이 바로 김회장의 한의원이었다. 그는 먼저 오랜 시간 동안 C양과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눴다. 환청이란 원래 ‘마음의 병’이므로 C양의 마음 상태를 알기 위해서였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김회장과 C양은 서로 마음이 통했다. C양도 울고 그도 울었다.

“마음이 어떤 것에 붙들린 환자가 운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흘리는 눈물과는 다르다. 그래서 부모를 불러 치료해 보자고 했다.”
일단 열흘치 약을 지어주고 차도를 살폈다. C양은 “소리가 들리려고 할 때 가만히 정신을 차리면 소리가 작아진다”며 약간 나아진 기미를 보였다. 다시 한번 약을 지어주고 복용을 마치자 환청은 씻은 듯 사라졌고 이듬해 복학해 그뒤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살아났기 때문에 나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회장은 이 일이 있은 후 스승인 무위당 선생을 찾아갔다.

“선생님을 뵐 때마다 큰절을 하는데 그날은 두번 절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하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선생님 덕분에 이런 병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하고 감사드렸다.”

지금 한의학계에는 기존의 흐름과는 다른 새로운 조류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보약’으로 대표되는 ‘귀족의학’이 아니라 본격적인 ‘치료의학’으로서의 한의학을 연구하고 임상에 적용하는 황교수와 김회장 같은 젊은 한의사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에게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의학계 내부에서는 벌써부터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한의학의 영역 밖이라고 여겨졌던 각종 질병 치료에 도전해 한의학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새 시대의 프론티어들-. 이들은 ‘소문학회’(素問學會)라는 학술단체를 조직해 한의학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본격적인 치료의학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온힘을 쏟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스승으로 모시는 무위당은 누구인가. 무위당 이원세 옹은 구한말 정통 한의학의 맥을 이은 분으로, 이 시대 최고의 명의로 손꼽힌다. 올해 98세인 무위당은 최근까지도 제자들을 앞에 두고 꼬박 두시간씩 강의할 정도로 건강한 편이었지만 최근 들어 기력이 쇠해 일반 방문객을 맞지 않는다고 했다. 직접 얼굴을 대하지 못해 안타까웠지만 제자들을 통해 그의 일대기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소문학의 大家’ 무위당은 누구인가

이원세 옹은 1903년생으로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17세 때까지 서당에 다니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마쳤다. 집안이 빈한하여 장남으로서 집안을 일으킬 책임을 지고 교육을 받은 것이다. 그후 20세까지는 의학을 위주로 배우면서 생활의 방편을 모색했는데 수업료를 낼 수 없어 이리저리 스승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무위당이 의탁한 집에 어느날 당대의 대학자 석곡 이규준 선생이 방문했다. 무위당은 심부름을 드나들며 먼 발치에서나마 석곡 선생의 학문이 깊음을 알고 한눈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틈을 보아 “어디로 가면 선생님을 뵈올 수 있습니까”하고 석곡에게 물었다. 석곡 또한 무위당의 천품을 알아보고 “모월모일 어디로 오너라”하고 떠났다.

무위당은 곧장 당시 대구의 유력자였던 석재 서병오의 집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석재는 석곡보다 7세 연하로, 그의 문하에 들었으나 대구에서는 오히려 석곡보다 더 유명인사였다. 천석꾼에 군수를 지냈으며, 서화가이자 팔방미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 석재도 석곡을 만나 병고침을 받자 무릎을 꿇고 제자 되기를 청했다.

무위당은 무일푼으로 석재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힘겨운 학업이 시작됐다. 한달에 두어번 찾아온 석곡이 무위당을 부르면 평소 궁금했던 것을 한두마디 여쭙는 것이 당시 공부의 전부였다. 그러나 무위당은 비상한 결심으로 그 한계를 극복하며 스승의 학맥을 이었다. 얼마후 석곡이 세상을 떠나면서(1923) 석재에게 무위당을 부탁했고, 무위당은 6년7개월간의 문하생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20대 후반의 무위당은 한약방을 열었다. 주위에서는 나이와 경험이 적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치적으로 병을 다스려 내니 1년만에 명의로 소문이 났다. 주위의 연로한 약종상들도 젊은 무위당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고, 결국 가솔들의 난치병까지 무위당에게 진료를 맡김으로써 백기를 들었다. 이런 명성 덕택에 시골의 한의사라는 고단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3년만에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말 갈수록 가혹해지는 수탈은 그나마 돈을 좀 번다고 소문난 한약방을 가만두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수탈이 심해지자 무위당은 마침내 몇몇 사람과 함께 산으로 피신했다. 그 와중에 해방이 됐다. 그는 산에서 내려와 가산을 정리해 대구로 자리를 옮겼다.

해방후 대구에서 한의원을 연 무위당은 제2회 한의사시험을 통과해 정식 한의사가 된다. 그러나 가급적 침술을 쓰지 않고 환자도 많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환자와 인생상담을 하고 세밀한 처방으로 난치병을 완치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때는 하루 10여명의 환자만 보았다고 전한다.
한사람 한사람 꼭 맞는 처방을 통해 병을 완치해 주는 그의 실력에 혹해 많은 사람들이 문하를 드나들었다. 그도 대구 시절 후학을 기르기 위해 몇번이나 제자를 두었으나 대개 급한 처방 몇개 얻는 정도에 그치고 원론부터 배우고자 하는 열의는 적었던 모양이다. 그는 ‘고기잡는 법’을 가르치려 했으나 그의 문하에 드는 사람은 ‘고기’만 갖고 싶어했던 것이다.

무위당은 늘 자신의 실력을 내세우지 않고 조용한 인술을 폈다. 그러나 한때 마음고생을 심하게 겪는 바람에 40대에는 간경화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기도 했으며 50이 돼서야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고 한다. 1985년 평생을 각별한 정분으로 주위에서 부러워했던 부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무위당은 대구 한의원의 문을 닫고 큰아들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같은 부산 하늘 아래 살게 된 것, 이것이 젊은 한의사 그룹이 그를 찾아오게 된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