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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1-08-03 15:06
월간중앙 8월호에 나온 기사입니다.(2)
 글쓴이 : 소문지기
조회 : 7,928  


무위당의 스승 석곡 이규준 儒佛仙 三敎 통달한 ‘유학의 大家’

‘素問學’으로 한의학 왜곡 바로잡았다

석곡(石谷) 이규준(李圭晙) 선생은 경북 영일 사람으로 1855년에 나서 1923년 사망한 구한말의 대학자다. 석곡은 대개 유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유학 외에도 의학·수학·천문지리 등 동양학 전반에 관한 저술을 모두 60여종이나 남겼다.

석곡은 그동안 내려오던 동양학의 각 분야에 결정적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것을 성현의 경전에 입각하여 바로잡아 학계와 일반이 더 이상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데 목표를 두고 책을 저술했다.
석곡은 그동안 저질러진 가장 큰 오류로 유학에서 주자 이후로 심(心)과 성(性), 이(理)와 기(氣)를 나누어 논한 것과 의학에서 음양관과 진맥 방법을 잘못 파악한 것을 들었다.

이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는 것은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의 지동설 주장 이상으로 혁명적인 작업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는 석곡의 의학사상은 기존 한의학과 핵심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그동안 무릇 질병을 앓으면 생기는 열(熱)의 원인은 군화(君火)와 상화(相火) 둘이 있어 양(陽)이 넘치기 쉽고, 음(陰)은 부족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열을 식히고 음을 보(補)하는 청열자음법(淸熱滋陰法)을 대법(大法·올바른 치료법)으로 삼았다.

그러나 석곡은 “내경”을 인용하여 군화·상화가 둘이 아님을 증명한 뒤, 열이란 생기가 마지못해 열을 내는 것이지 몸 스스로 열(陽)이 많아서가 아님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열은 생기의 출입이 막혀 나는 것이며, 생기를 통하는 것은 더운 약이 잘 하니 생기 유통을 억압하고 기운을 까라지게 하는 찬 약 쓰기를 아끼도록 당부하였다.

또한 찬 기운이 밖에서 들어왔거나 안에서 생겼거나 간에 모두 열이 나므로 열은 현상이요, 근본은 찬 것이므로 찬 것을 우선으로 다스리면서 열을 조금씩 다스리는 것이 근본치료임을 말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동안 한의사들이 처방하기 꺼리던 부자를 흔히 사용하여 많은 중병과 난치병을 다스림으로써 양을 도우는 것이 치료의 대법임을 증명하였다.

또한 기존의 진맥(診脈) 방식은 손가락 셋을 이용해 횡적으로 보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오장육부의 상태를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맥은 현현묘묘하다’는 말이 나돌게 되었다고 갈파했다. 석곡은 “황제내경”과 “난경”에 의하면 맥은 깊이대로 다섯층을 종적으로 보는 것이며 이렇게 할 때 오장육부의 생기 상태가 또렷이 나타난다는 것을 밝혔다.

이처럼 석곡은 왜곡된 음양관과 맥론이 한의학의 치료율을 떨어뜨린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을 밝히는 한편, 스스로 수많은 난치병을 고쳐 소문학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고 전한다.


집담회에서 참석한 소문학회 임원진.왼쪽부터 금종철 소문 TV대표 장숙희 김시,황덕원 학술위원장,김태국 회장,박태수고문,김명준 부회장

무위당과 젊은 한의사들의 아름다운 인연

당시 부산에서 활동중이던 경희대 한의대 동문 중 친한 선후배 10명이 모여 공부를 겸해 친목을 다지는 모임이 있었다. 이들은 매주 한번씩 만나곤 했는데 어느날 모임 회장을 맡고 있던 김중한(동의대 교수)씨가 어디서 무위당 이야기를 듣고 “대구에서 이름을 날리던 대단한 분이 부산에 와 계시다는데…”하며 운을 뗐다. 다들 궁금해하자 김교수가 먼저 찾아가 보기로 했다. 두번이나 무위당 댁에 다녀온 김교수는 “대단한 분이다. 원전(原典)부터 치병(治病)까지 막힘이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는 “우리끼리 공부할 것이 아니라 이분께 가서 배우자”고 발의했다. 그래서 10명의 젊은 한의사들은 그대로 무위당을 스승으로 모시게 됐다.

“선생님은 대구 시절의 경험 때문인지 1년 내내 황제내경 소문(素問)편만 강의하셨다. 마치 이 사람들이 정말 ‘공부’하러 온 것인지 시험하는 것 같았다. 사실 섣불리 처방부터 말했다가 제자들이 병리도 잘 모르고 부자 같은 약을 함부로 써서 탈을 냈더라면 지금의 소문학회는 없었을지도 모른다.”(김명준 부회장)

처음에는 주위 한의사들도 ‘오래 가겠느냐’며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공부모임에 참석하는 한의사들은 점점 늘어났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소문학회로, 부산에서 창립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간 한의사들의 학술모임이다. 현재 도마다 지부가 설치되어 있다. 소문학회라는 이름은 무위당 선생이 “황제내경 소문”(黃帝內經素問)을 기본으로 하여 의학을 강론했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중국 고대 황제 헌원씨가 지었다는 이 책은 동양의학의 경전으로 추앙받는다.

무위당 선생은 그의 스승인 대학자 석곡 선생에게서 의학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무위당이 유명해진 것은 어떤 특정한 질병을 잘 다스린다거나 특별한 비방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스승인 석곡 선생은 “황제내경 소문”의 핵심을 간추린 “소문대요”(素問大要)와 “동의보감”에서 소문의 원리에 맞는 내용을 간추린 “의감중마”(醫鑑重磨)라는 두권의 의서를 남겼고, 무위당은 스승의 처방을 전국에서 모아 편집한 “신방신편”과, “의감중마”에 고금의 처방을 편집해 넣은 “백병총괄 방약부편” 등 두권의 저서가 있다. 그는 스승에게서 배운 소문학을 평생 실천하면서 꾸준히 이를 널리 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무위당은 젊은 시절부터 조리있는 이론과 뛰어난 실력을 겸비한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그는 명성을 탐하지 않았고 유명세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지도 않았다. 비록 남의 앞에 나서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그를 존경했다.

그는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비방’을 위주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원론에서부터 병을 풀어 나가는 방법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종기 환자가 많았다. 때문에 많은 고약이 나왔으나 정말 효험 있는 고약 처방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바로 한의사들의 ‘비밀주의’ 때문에 훌륭한 처방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보면 무위당은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눠 주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무위당 선생님이 석곡 선생을 만난 것도 인연이요, 선생님이 무병장수하신 것도 인연이다. 제자들이 찾아갔을 때 벌써 여든을 넘긴 선생님이 정신이 또렷하고 매일같이 찾아가도 강의하실 정도로 건강하셨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정통 한의학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게 되었다.”(금종철 소문TV 공동대표)